의암별제(2013,경상남도)

종목 개요

구 분 내 용
참여대회 제54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및 제20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
참여지역 경상남도
분야 의례
참여단체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수상(단체상) 신명상 (한국민속예술축제추진위원장상)

종목소개

의암별제는 논개사적비로 역사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논개의 사적은 임진왜란 직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된 바 있으나, 공식 사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진주에서 논개를 기리는 것은 진주 백성들의 요청에서 비롯되었다. 논개가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자 진주 백성들이 지속해서 관에 그 행적에 대한 포상을 요청한 것이다. 1722년(경종)에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의암’으로, 논개의 제사를 지내던 논개사를 ‘의기사’라 이름 붙이고, 강 위 언덕에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후 1868년에 사당을 중수하고, 기녀들로만 치르는 풍류제례인 ‘의암별제’를 창설했다. 첫 제례를 베푼 무진년만 해도 기녀 3백여 명이 모여 악·가·무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성대한 의식을 치렀고, 사흘간 벌인 여흥 잔치 역시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절된 ‘의암별제’가 1992년에 복원되면서 풍류 제례이자 여성이 주축이 된 대동 축제로 발전했다.

의암별제는 진설찬어촉석루상, 채화삽어 각기상, 헌관이하 개성복 루하대립, 영신례[迎神禮], 상향례[上香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사신례[辭神禮], 여흥가무[餘興歌舞] 순으로 진행한다. 의암별제 진행을 위해 유영희, 양지선 등이 소리를 맡았고, 대금, 피리, 해금, 아쟁, 장구, 좌고 등의 악기로 반주했다.

의암별제의 진행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입장 제관이 등장해 알자가 신주를 받들고 대축과 함께 신 위앞에 나아가 신주를 대축에게 건네주면, 대축은 그것을 받아 교의에 안치한다. 조촉이 양쪽으로 갈라선 다음, 알자 대축은 내려와서 제 집사 석에 선다. 삼헌관은 헌관석에, 악장은 당상악관을 인솔하고 당하악관은 휘수의 인솔 아래 자기 자리로 들어선다. 제집사는 두 줄로 자기 자리에 서고, 무관은 일무석에 나가 선다. 陳設饌於 矗石樓上 제찬을 갖춰 촉석루에 차려놓는다 彩花揷 各器上 채화를 제수 위에 꽂아 장식한다 獻官以下 皆成服 樓下待立 헌관 이하 제집사가 예복을 갖추고 촉석루 아래 대기해 선다 行迎神禮 영신악을 연주하고 영신례를 행한다

  2. 제례 독을 열고, 촛불을 켜고, 상보를 걷고, 봉향·봉로는 향을 피운다. 신을 맞이하는 예와, 향을 올리는 예를 행하며,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의 순으로 진행한다. 이때 논개를 상징하는 의암부인의 영혼을 보내는 예를 행한다. 行上香禮 삼상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린다 行初獻禮 초헌관이 초현악에 맞춰 초헌례를 올린다 行亞獻禮 아헌관이 아헌악에 맞춰 아헌례를 올린다 行終獻禮 종헌관이 종헌악에 맞춰 종헌례를 올린다

  3. 헌무 및 퇴장 行辭神禮 의암별곡과 별무에 맞춰 내빈분향 및 음복례와 망요례를 행한다 餘興歌舞 제찬을 물리고 여흥가무를가 펼치며 헌무는 진주검무로 한다

    의암별제는 역사적 근원이 분명한 지역 고유의 제례다. 지역에서 이를 제례로 전승한 것은 물론, 여성을 주축으로 성대한 풍류제례인 대동축제 한마당으로 이어왔다. 지역 공동체가 지역성을 지키면서 유지해 온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논개를 통해 민족 충혼을 기리는 전통을 지키려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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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출처 : 『한국민족예술축제60년. 변화와 도약 해적이』
  • 발행연도 : 2019.12.31
  • 기획 :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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