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쟁이놀이(2016,경상남도)

종목 개요

구 분 내 용
참여대회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및 제23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
참여지역 경상남도
분야 민속놀이
참여단체 솟대쟁이놀이보존회
수상(단체상) 금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종목소개

‘솟대쟁이놀이’는 1900년대 전후 진주 지역을 본거지로 경상남도 일대를 떠돌며 예능을 팔던 유랑예인집단 ‘솟대쟁이패’의 놀이를 재현한 작품이다. ‘솟대패’로도 불린 이들은 주로 솟대타기나 줄타기 등으로 구성된 놀이를 했다. 솟대쟁이놀이는 1930년대 사라진 솟대쟁이패를 진주농악 중심으로 재현한 것이다.

놀이의 주요 구성은 놀이판 한가운데 솟대와 같은 긴 장대를 세운 후, 그 꼭대기로부터 양편으로 두 가닥씩 줄을 늘여놓고 솟대타기나 줄타기 등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또한 솟대쟁이패는 버나, 살판, 병신굿을 하기도 했다. 솟대타기는 쌍줄백이와 새미놀이로 나뉘는데, 특히 쌍줄백이는 줄타기와 비슷하나 다른 점은, 나다닐 수 있는 줄이 두 개이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팔걸음, 줄 위를 구르는 고물 묻히기 등 재주를 부린다는 것이다.

솟대쟁이패 구성원은 서로 교류가 잦았으며, 그 조직이 남사당패와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솟대쟁이패와 남사당패는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교류했고, 놀이 내용 면에서도 서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살판, 얼른, 버나, 벅구놀이 등은 남사당패가 솟대쟁이패와 교류하면서 놀았던 종목이기도 하다(솟대쟁이패는 특히 벅구놀이에 특출함을 보였다고 한다). 두 패거리를 직접 왕래했던 송순갑은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여덟 살 때 솟대쟁이패에 들어가 ‘이우문’이라는 진주 사람에게서 살판을 배웠다고 한다. 패거리는 이우문을 중심으로 193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이후 해체했다고 한다. 솟대쟁이패는 해체 후 진주에 다시 모여 옛 솟대쟁이패굿을 연행하면서 포장걸립이나 뜬쇠패로 농악경연대회에 참가했다. 특히 솟대쟁이패의 연행 종목 가운데 농악은 해방 이후 강두금 선생(현재 진주삼천포농악 인간문화재 김선옥 선생의 외조부)이 진주농악회를 구성하면서 그 계통을 이어갔고, 황일백, 조명수, 송철수, 윤판옥, 김도생, 문현재, 조판조 등의 명인들이 당대에 같이 활동하면서 기능을 전수했다. 1965년 7월 문화재 보호 정책의 하나로 국가무형문화재 조사가 있고 난 뒤, 이듬해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농악12차’로 명명되어 전승의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 활동 중인 박염 선생과 김선옥 선생은 솟대쟁이패 출신 명인들을 사사해 ‘진주삼천포농악’ 인간문화재로 활동하며 그 계통을 잇고 있다. 또한 솟대쟁이패의 거점이었던 진주에서는 솟대쟁이놀음의 복원·재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솟대쟁이놀이는 남사당패와 더불어 근대 유랑예인집단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민속이다. 오광대, 살판 등 전문적인 민속 체기·곡예·기예를 포함한 다양한 놀이를 솟대쟁이패에서 행했다. 이미 오래전 농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진주삼천포농악을 중심으로 솟대쟁이패의 옛 영광을 되살리고자 하는 점에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솟대쟁이패의 위상을 되살리는 방안을 지속해서 마련하는 동시에 창조적으로 발전할 방안도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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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출처 : 『한국민족예술축제60년. 변화와 도약 해적이』
  • 발행연도 : 2019.12.31
  • 기획 :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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