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원성(2023,함경북도)

종목 개요

구 분 내 용
참여대회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
참여지역 함경북도
분야 민요, 무용
참여인원 31명
참여단체 함경북도애원성보존회
수상(단체상) 전승상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사장상)

종목소개

종목명 해설

고양시 2022년, 인구 100만 명 이상의 특례시로 출범한 고양시는 우리 역사에서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여러 변화를 겪어왔다. 현재 3개구, 44개 동으로 구성돼 광역시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국제 전시컨벤션이 가능한 공간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공존하는 도시다.

진밭두레농악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진밭마을에서 전승되는 농악을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 어려움을 딛고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부활했으며, 성석 진밭 두레패는 2005년 고양시 향토문화유적(무형문화유적)으로 지정됐다.

정보

지역 경기도 종목 농악 인원 45명 단체 정발초등학교 연합팀 지정 고양시 향토문화유적, 2005년

본문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고양시는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과 하천 퇴적지인 곡저평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산과 우암산을 이웃하고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니 사람이 터전을 잡고 살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을 테다. 또한 고양은 가장 오래전 농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5020년 전, 서기 2000년경에 사람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와지볍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재배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고양이 한반도 농경문화의 기원이며 한강문화권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해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한반도 농사의 기원을 품고 있는 도시답게 이곳은 농경 사회를 중심으로 문화예술도 풍부하게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진밭두레농악은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진밭마을에서 전승되어 왔으며 농사일을 할 때 두레를 짜고, 두레패가 농사일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연행하던 농악이다. 두레는 농촌 사회의 핵심 역할을 하는 자발적 공동체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돕고, 일손이 필요할 때는 함께 일하며, 마을의 질서를 깨뜨리거나 어지럽히는 일을 막았으며 마을마다 두레를 표시하는 깃발도 존재했다. 모내기에서 물대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까지 이르는 논농사 경작을 위한 모든 과정에 두레가 함께 일했으며, 특히 많은 인력이 합심해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됐다. 물론 마을의 공동 잔치로 진행하는 풋굿이나 호미씻이와 같은 논농사 이후 놀이의 중심에도 두레가 있었다. 대체로 모내기나 추수를 마친 뒤 공동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농사로 인한 노고를 잊고 결속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두레패와 마찬가지로 진밭두레 역시 조선 초기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침체를 겪었다. 당시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농촌의 농악과 두레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진밭마을은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농기에 태극기를 달고 참여하였고, 이후 진밭두레와 농악패를 재결성해 100년간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오늘날 진밭두레 농악에는 옛 농경 공동체 생활 풍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산제사에서부터 농사소리, 농사놀이, 상여소리, 회 다지소리, 지경소리, 대보름 쥐불놀이, 농악놀이까지 한 당시 지역민들의 생활문화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진밭두레패는 변주가락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일반적인 연희 농악과 다르게 기본 가락에 충실하면서도 장단마다 끊어치며 만들어내는 웅장함이 일품이다. 다른 농악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악기인 제금을 사용하며, 법고 수도 많다. 특히 농악패와 농사꾼이 진을 짜면서 연주와 놀이가 어우러지는 놀이 판제인 농사놀이에서 을(乙)자진, 원진, 멍석말이, 방울진, 십자진, 사각진(사통백이) 등 다양한 진법을 구사하여 놀이의 총체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과장 구성

  1. 길맞이 징이 울리면 두레패가 무대 중앙으로 들어가고, 농악패와 자진가락을 맺는다. 이후 삼채장단으로 기수단·농부·잡색이 큰 원 안에, 농악대는 바깥에 중앙을 바라보고 선다.
  2. 길놀이굿 상쇠가 안으로 들어가며 멍석말이를 시작한다. 농부는 소고잽이 꼬리를 물고 따라 돌며, 멍석말이를 풀어 큰 원이 만들어지면 농부와 소고가 중앙으로 들어가 논다.
  3. 제1당산놀이 악기와 소고가 좌우로 벌려 상쇠를 보고 마주서고, 농부는 기수단 앞에 횡대로 섰다가 쓰레질 놀이와 논뚝 다지기를 한다.
  4. 사방치기와 네줄백이 당산놀이가 끝나면 큰 원을 만들어 사방치기로 전환한다. 두레패와 농악패가 두 개의 원을 만들어 전후좌우로 이동하며 연희하다가, 다시 자진가락과 삼채장단에 맞춰 네줄백이로 전환한다.
  5. 제2당산놀이 농부가 앞 뒤 좌우로 뒷걸음질하며 콩을 심고 풀을 베며 농사 놀이를 하고, 소고는 양상치기 후 제자리로 전환, 장단을 내주면 양 절구놀이 대형으로 전환하여 연희한다.
  6. 사통백이와 방울진 사방원진을 풀어 큰 원을 그린다. 원을 돌며 농부는 바깥쪽, 소고는 안쪽으로 교차하여 이동한다. 농부는 자리를 잡고 춤추며 놀고 소고는 마주보고 벅구놀이로 받는다.### 본문 한반도 북동쪽 최북단에 위치한 함경북도는 역사적으로 부침이 심한 곳이었다. 동쪽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인접하고 북쪽은 중국의 만주 간도와 마주한 변경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는 거대한 산맥에 둘러싸인 추운 산간지대인 데다 땅은 마르고 거칠어서 농업조차 어려웠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강제로 사람들을 이주시켰고, 정치적 유배지로도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여진족과의 오랜 싸움에 시달렸으니, 전반적으로 사회적 안정을 이루기 어려웠을 터.

이 지역의 주민들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대부분 국경을 넘어 북간도와 러시아를 전전했고,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애달픔과 서러움은 함경북도 사람들이 늘 공유하는 감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 슬픔과 애수가 깃든 애원성과 같은 토속민요가 생겨났다.

애원성, 사랑이 아닌 슬픔을 의미하는 이 노래는 본래 함경도 지역에서 널리 불리던 민요로, 애원성(哀怨聲) 또는 애원곡(哀怨曲)으로 불린다. 지역 원주민은 물론 각처에서 온 이주민들이 생활의 어려움을 담아 흥얼거리던 것이 이제는 통속 민요로 자리잡았다. 애원성은 독립된 민요로 불리기도 하지만 함경남도 북청사자놀음의 반주로도 쓰이며, 애원성춤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서울·경기 지역까지 전파돼 서도소리나 경기민요 소리꾼이 부르기도 하지만, 본래 함경도 지역의 여성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흥얼거리던 것을 채집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평안도에서 전해지는 애원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노랫말은 조선 시대 4군 6진 정책으로 새 땅을 일구는 시기에 함경도 원주민과 각처에서 옮겨온 이주민들이 겪은 생활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24절로 구성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절마다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슬픔, 북방 변경에서 느끼는 고단한 살림살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북간도로 떠나는 지아비의 마음과 무사 귀환을 바라는 부인의 애절함, 내 나라를 사랑하는 아낙들의 꾸밈 없는 생각 등이 배어 있어, 이름 그대로 여인들의 애원이 깃든 소리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원성은 서도소리 창법을 사용해 높은 청으로 한껏 내뽑기 때문에 슬픔보다는 씩씩한 기상이 느껴진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소리를 토해냄으로써 힘든 삶을 이겨내고자 했던 여인들의 의지가 아닐까 싶다.

애원성은 토속민요이지만 양식화된 다른 소리와 견주어도 좋을만큼 서도소리 특유의 선법이 잘 살아 있다. 후렴구에는 미묘한 장식음이 반영돼 있으며, 완전5도에 단3도를 쌓아 올려 부른다. 유독 서러움이 녹아내리는 듯 애달픈 노랫말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북방인의 성격이 깃든 후렴구가 경쾌한 느낌을 자아낸다. 여기에 함경도에서 보편적으로 연주되는 퉁소가 반주 악기로 곁들여진다. 악기 특유의 호방하고 애절한 음색이 노랫말과 춤의 성격을 강조한다.

본래 자연적으로 전승된 소리와 춤이지만, 1971년 처음 한국민속예술제에 참여할 당시 천지신명께 소원을 비는 민속신앙 의식을 노래 앞쪽에 곁들였다. 이는 대부분의 민속놀이에서 발견되는 구성과 형식을 연출한 것으로, 노래가 불리던 시대와 상황을 참고해 만들었다.

양팔을 들어 올리고 추는 대부분의 춤사위는 당시 우리네 어머니들이 추던 춤과 희로애락을 온몸을 받아들인 선조들의 몸짓에서 차용했다. 남한에서 애원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전승되면서 대부분 안무를 정형화했는데, 기존의 몸짓에 태평무 등 전통무용의 춤사위를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이로써 다양한 안무 구도를 감상할 수 있게 됐고, 노래와 함께 전체적인 그림이 더욱 다채로워졌다.

24절의 노랫말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모든 절은 “에헤에헤야/어헐사 좋구 좋다/얼럴럴 거리구 상사디야” 하는 후렴구로 맺는다. 크게 원을 그리며 노래하는 1절부터 5절은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지아비를 그리는 내용이다. 이어 6절부터 10절까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춤을 추기도 하고, 일렬로 대형을 바꿔 노래를 이어간다. 11절에서 15절은 떠난 임을 그리는 슬픈 노랫말로, “금수강산이 아무리 좋아도/정든님 없으면 적막강산이라” 하고 읊는다. 16절부터 24절까지는 여인들의 춤만 아니라 다양한 장면이 개입된다. 절 구분마다 징이 울리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후반부로 넘어가면 퉁소 가락이 다채롭게 변주되고, 아이들의 바가지춤이 등장한다. 평안북도의 풍경을 일부 재현한 것으로, 무대에 유쾌함을 더하는 장치다. 한반도 북쪽 끝자락, 우리네 어머니들이 부르던 노래와 춤을 만날 기회다.

과장 구성

  1. 돌 쌓기 : 칠성단에 제사를 올리는 장면. 본래 애원성은 노래와 춤만 전승되지만, 양식화 과정에서 덧붙인 부분이다. 원을 그리며 등장해 무대를 한 바퀴 돌아 칠성단에 돌을 쌓아 올리고 고사를 지낸다. 징과 장구, 퉁소 반주가 뒤따른다.

  2. 흰 수건 :

여인네들이 흰 치마저고리에 분홍 고름을 단 의상을 갖춰 입은 뒤 흰 수건을 들고 등장한다. 다양한 형태로 구도를 바꿔가며 춤추고 노래한다. 수건은 정성을 다해 축원을 드리는 모습을 의미한다.## 문화재 지정 현황이북5도 무형문화재(함경북도)(2005년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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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출처 :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 종목소개서 * 발행일 : 2023년 9월 22일 * 기획 :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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