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야류(1965,경상북도)

종목 개요

구 분 내 용
참여대회 제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여지역 경상북도
분야 민속극
수상(단체상) 대통령상

종목소개

내용

동래야류는 수영야류를 본받아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동래나 수영 사람들이며 역사는 약 120년쯤 된다고들 한다. 정확한 연대고증은 불가능하지만 1933년에 집필한 송석하 백씨의 오광대소고에 의하면 그 전파과정을 초계에 가 있던 수영 사람이 보고 와서 수영에다 전파하였고 동래는 수영의 놀이를 본받았다고 하였고 그 시기는 약 60년 전이라 했으니, 현 동래 사람들이 말하는 1백 20년 전의 유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이 방면의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가면에 있어서 수영과 동래는 각기 특색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래보다는 수영의 것이 고형이라고 함을 보아도 수영에서 동래로 전파되었으리란 의견을 굳히게 해준다. 동래야류는 1백 70여년의 전통을 가지며 관리출신을 주로 한 친목단체인 기영회의 후원에 의하여 전승되어 왔는데 이것이 다시 약 60년 전에 발족한 신흥계에서 담당하다가 그 이듬해 망순계로 바뀌어 계승되어 왔으나 1935년경 일제의 탄압으로 줄다리가와 함께 중단되었었다. 그러다가 8․15광복 이후 젊은층에서 조직된 남우희의 약 30명 회원은 1946년 음력 정월 초순과 중순 두 차례에 걸쳐서 지신밟기를 하여 희사받은 것을 기금으로 3․1절 경축 들놀음에서 양반과장과 할미과장을 연출하였으니 약 10년 만에 동래야류의 전통이 이어진 셈이다.

순서

동래들놀음의 절차의 수영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 순서에 따라서 간략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1) 준비과정_ 예전에 동래에는 정월 대보름날을 전후하여 연행되던 줄다리기와 말놀이가 있었는데 이 연중행사를 하기 위하여 음력 정월 3월 초 3일경부터 지신밟기를 하여 경비를 조달하였다. (2) 길놀이_ 14일 저녁이 되면 세병교(현 동래앞 다리)나 만년당(현 동래중학 교정), 또는 연치마당(현 안락동) 혹은 마암곡(온천장 말바우골)에 연희자와 군중이 모여 길놀이의 준비를 하고 어둡기를 기다린다. 길돌이는 탈놀음판인 동래읍 복천동(현 동래구청 앞) 폐문련 마당에까지의 대행렬인 것이다. 맨 먼저 대청계초용 2개가 서고 그 다음 그해의 십이지상의 큰 등이 선다. 5백 개나 되는 소등은 일렬로 배열하거나 혹은 적당한 장소에 배치하기도 하며 그 밖에 용등․봉등․학등․구등․가마등․포도등․일산등 등도 간간히 배치한다. 연희자의 행진순서는 다음과 같다. 악사→말을 탄 중군→진군악대(한량과 기생)→팔선녀(선녀는 말을 타고 한량은 마부)→원양반, 말뚝이, 차양반, 모양반, 네째양반, 종가집도령, 영감, 제대각시, 문등이1,2, 비비양반, 영노 등의 야류패→가마를 탄 할미→우마차를 타고 기생들과 가무하는 한량패→오동풍악→군중. (3) 군무_ 길놀이 행렬대가 놀이판에 닿으면 대소의 각종 초롱불을 적당한 곳에 달아 조명되게 하고 모인 군중들이 흥에 겨워 덧뵈기춤에 도취되니 군중의 잔치인 것이다. 동래에서는 특히 각자의 장기에 따라 학춤․장군춤․배춤․궁둥이춤․구불춤․요동춤․꼽추춤이 볼만했다고 한다. (4) 탈놀음_ 동래야류는 수영과 같이 4과장인데 1974년 부산민족예술보존협회에서 정립하여 현행되고 있는 대본에 의하여 내용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제1 문둥이 과장> 문둥이 두 명이 왼손에는 소고를, 오른손에는 북채를 든 채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등장하여 춤을 추는데 자빠지기도 하고 누워서 뒹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문둥이 과장의 연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1930년대 이후에는 단절된 듯한 감이 있으며 근래에도 동래에서는 이 문둥이과장을 잘하지 않고 있다가 1974년부터 시작하는 형편인데, 야류계의 수영에 사자무과장이 있는데 비하여 동래에는 문둥이과장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제2 양반과장> 동래야류는 이 양반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수영야류나 오광대계와 마찬가지이지만 야류계 양반과장의 형상이 오광대 것보다 멋지다. 하인 말뚝이가 원양반을 비롯한 다섯 양반을 모욕하고 야유하는 내용인데, 줄거리의 순서에 따라 훑어본다. 양반들이 시끄럽게 말뚝이를 부르면 말뚝이는 욕설로 응답한다. “이 제기를 불고 금각 대명을 우둥우둥 갈 이 양반들아 오늘 날이 따따무리하니 온갖 짐생 다 모였다. 손골목에 도야지새끼 모은 듯, 옹달샘에 실배암이 모은 듯, 논두름 밑에 돌나무생이 모은 듯, 삼도 네거리 히둑새 모은 듯, 떨어진 중우 가랭이 신대가리 나온 듯……” 원양반이 개똥상놈 하나를 죽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면, 말뚝이는 십대 조상부터 벼슬한 명문거족이었다고 호통한다. 원양반이 과거대가 가까워 오는데 어디엘 그렇게 돌아다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말뚝이는 생원님을 찾으려고 서울로 올라가서 “……일금정 이목골 삼청도 사직골 오부 육조앞, 칠간안, 팔각정, 구리개, 십자로로 두렷이 다 다녀도 생원님은커녕 내 아들놈도 없습니다.”라고 조롱하였으며, 또, “행여 생원님이 도방에나 계시난지 도방을 썩 들어서서 일금산, 이강경, 삼포주, 사마산, 오삼랑, 육물금, 칠남창, 팔부산……”을 찾아 다녀도 없기에 색주가를 다 찾고 마지막으로 본댁에나 계실까 하여 들어갔더니 대부인 마누라가 녹의홍상에 칠보단장하고 음란하게 앉아 있더라고 야유한다. 말뚝이는 양반들을 계속 희롱하다가 마지막에는 “……원앙침 도도비고 비취금 무립 쓰고 대부인 마누라도 청춘이요 말뚝이도 청춘이라 청춘홍몽이 겨워 두 몸이 한몸되야 왼갖 수작놀았이니 그 농락 어떠하리”라고 모욕한다. 말뚝이 재담의 멋진 끝맺음이다.

<제3 영노과장> 이 과장도 양반을 모욕하는 내용이다. 얼룩덜룩한 큰 보자기를 뒤집어 쓴 영노가 ‘비- 비-’ 소리를 내며 비비양반을 따라다닌다. 양반은 무엇인가고 묻는다. 영노는 양반 99명을 잡아먹었는데 1명만 더 잡아먹으면 득천한다고 한다. 양반이 자기는 양반이 아니라고 하며 영노가 묻는 말에 자기는 똥․개․돼지․소․풀새기(쐐기)․구렁이라고 하면, 영노는 그것도 모두 잘 먹는다고 하며 달려든다. 양반은 쓰러져서 영노의 행패를 당하다가 마지막에 함께 어울려서 한바탕 춤을 추며 논다.

<제4 할미과장> 할미가 등장하여 악사(마을사람)에게 어떤 영감이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마을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고 묻는다. 할미는 색골로 생겼으며 키가 크고 얼굴은 갸름하며 키가 크다고 한다. 마을사람이 조금 전에 지나갔다고 하니 할미가 초조하여 무대를 돌고 있을 때 영감이 등장하여 악사에게 어떤 할미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악사가 할미의 모습을 물으니 영감은 얼굴이 도르쪽쪽하며 입이 크다고 답한다. 영감은 반대편으로 할미를 부르며 돈다. 할미는 영감 생각이 났는지 오줌을 누는 형용을 한다. 이리하여 상봉한 할미와 영감은 굿거리장단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추다가 영감이 할미를 찾으러 제물포에 갔다가 작은마누라를 얻었다며 제대각시를 불러 소개를 시킨다. 할미의 제대각시에 대한 맹렬한 질투와 영감이 떠날 때 두고 간 아들 삼형제를 모조리 사별한 데 화가 난 나머지 영감은 할미를 발길로 차 눕혔는데 할미는 일어나지 못한다. 영감이 당황하여 의원을 불러서 침을 놓았으나 소생치 않아 이번에는 봉사를 불러 독경을 시켰으나 할미는 결국 죽고 만다. 여기에 있어서 처첩 간의 갈등만을 나타냈을 뿐 생활의 곤궁상에 대한 내용은 없다.

문화재 지정 현황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유 (1967.12지정)

관련링크

자료출처

  • 출처 : 『한국의 민속예술 50년사』
  • 발행연도 : 2009.12.31
  • 발행 : 제5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추진위원회

민속곳간이 제공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입니다.
출처 표기 후 사용가능하나, 상업적 이용 및 내용을 변형 또는 재가공 할 수 없습니다.